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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 슈퍼스타들의 만남

라흐마니노프


하도 오랫동안 소리가 나지 않길래 '설마 타건은 했는데 정말 안들릴정도로 작게 치는건가'란 생각을 했다. 물롤 내 생각은 틀렸다. 베이스는 계속 같지만 묘하게, 정말 묘하게 바뀌는 수 개의 화음이 지난 후 오케스트라의 현이 밀려들었다. 군더더기없고 그야말로 라흐마니노프 2번다운 그런 스트링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좀 더 크게 울어주기를 바랬지만 오케스트라는 항상 랑랑을 넘어서지 않았다. 중간에 수 번 피아노가 거의 들리지 않다시피했지만, 딱히 오케스트라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점점 연주, 그리고 연주자에 대한 느낌을 말하기가 두려워진다. 결국 독자는 '좋았'거나 '나빴'거나, 둘 중 하나를 원하는 게 아닐까. 이 걱정을 하며 말하건대, 랑랑의 라흐마니노프는 그다지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지 못했다. 테크닉적으로 부족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석이 너무 마음대로인것도 아니었다. 혹자들은 싫어하는 조금은 과장된 액션때문에 음악이 가려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무덤덤했던건, 그저 랑랑이 표현하고자 하는 라흐마니노프가 어떤 것인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랑랑의 잘못일 수도 있고, 내 잘못일 수도 있다. 물론 짧은 식견만을 가진 내 잘못일 가능성이 크지만, 수 번 들어본 라흐마니노프와는 다른 라흐마니노프였다.
그렇다고 연주가 지루했다거나, 보기 싫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랑랑은 2악장을 굉장히 서정적으로, 잘 연주했고, 3악장의 그 호쾌함?통쾌함? 그건 마치 재즈에서의 그루브가 주는 그 느낌같았다.
오케스트라는 늘 랑랑의 뒤에 있었다.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지 않고 잘 있어주었다. 피아노를 이겨도 될 것 같은 몇몇 부분에서도 나와주지 않은게 아주 조금 아쉽긴 했지만.

앵콜은 조금 의외였다. 쇼팽 에뛰드 '이별'. 많은 사람들이 신나게 질주하고 강하게 건반을 내리치는 그런 곡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랑랑은 왠지 이런 사람들의 뒷통수를 쳐주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인터미션
a


공연을 혼자 보러 갔다. 학기중이라서 친구를 끌고 올 수도 없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도 모두 바쁘단다. 사실 표 값도 학생들에겐 부담스럽다. 나도 사실은 동아리 연습과 앞으로 3주간 있을 무지막지한 과제들을 두고 보러갔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을 보면 왠지 모를 부담감이 나를 괴롭힌다. 다음주까지 이거 해야되는데, 내일 아침에 저게 있는데.
왠지 이날은 그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기대가 모든 걱정을 덮어버렸다.

아, 물론 갔다온 다음날 엄청 고생하긴 했지만.

b
랑랑의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20대 여성분들의 괴성을 듣기는 쉽지 않은데.




말러


말러를 공연장에서 본 건 5번 뿐이다. 5번 교향곡만 세 번을 봤다. 세 번 모두 너무나도 다른 말러였고, 세 공연은 모두 좋았다.
나는 1번은 실연으로 들어본 적이 없다 음반으로도 그다지 즐겨듣지 않는다. 한번 듣고 나면 정신이 없다. 5번이나 여기저기서 쾅쾅 터지기는 마찬가지이지만, 5번의 그 꽉 짜여진 그런 느낌에 비하면, 뭔가 얼기설기 음표를 엮어 만든 것 갈다.


라스칼라의 연주도 그랬다. 원래 그렇지도 않은 걸 억지로 브람스처럼 절제하거나 완벽한 구조를 가진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악보대로, 터져야 할 곳에서는 터지고 모두 죽어야 할 곳에서는 숨죽이는 그런 소리를 들려주었다.

나에게 1악장은 ff로 연주가 되어도 곧 기억에서 사라지는, 전체가 왠지 pp로 유지되는 그런 악장이다. 특히나 조는 D인데 현악기들이 배음을 사용해 아주 높은 A를 연주하는, 그런 배경에 깔리는 묘한 긴장감이 인상적이다. 트럼펫이 뭔가를 해결해주는 듯한 팡파레를 터트려도 그때뿐이다. 곡은 다시 긴장한듯이 A음을 연주하는 그런 느낌으로 돌아간다.

연주는 정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최고의 스트링이 나의 귀를 그야말로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3악장의 베이스 솔로는 너무나도 기묘하고 이상해서, 듣다가 나가고 싶어질 정도였다. 스트링만 최고인 것은 아니었다. 시종일관 금관은 잔실수없이, 말러가 요구하는 대로 이곳에서 펑, 저곳에서 펑 하고 터져주었다. 아주 시원하게.

뭔가 얼기설기 엮여서 정신이 없는 곡이라고 해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너무나 뻔해서 이미 다 알고 있어도, 새삼스럽게 놀라거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피날레의 호른 아홉명이 일어나는 부분은 알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코다를 향해 무섭게 달려가는 음표들을 좇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치 4악장을 듣고 들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떨어뜨렸다던 귀부인이 된 느낌이었다.



정명훈이 지금까지 올해 지휘한 말러는 1번, 5번, 9번이다. 1번과 5번은 실황으로 들었고, 9번은 방송으로 들었다. 말러의 인생을 대충 세 부분으로 나누면, 그 시절을 대표하는 곡들이 바로 저 세 곡이 아닐까. 세 곡을 모두 들은 지금, 정명훈이 느끼는 말러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관객

관객들은 마치 호른이 일어선 그때부터 '박수를 쳐야지, 준비!' 라도 한 것 같았다. 몇 번의 커튼콜이 있고나서, 오케스트라는 '운명의 힘'을 연주했다. 괜히 졸면서 들으면서 끝에만 기립박수를 쳐대는 그런 관객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일어서는 걸 자제하고 있었는데, 이걸 듣고 나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정명훈이 이렇게 오페라를 잘 하는구나. 라스칼라가 이런 오케스트라구나. '준비하신 말러는 잘 들었어요. 근데 오페라가 좀 더 좋았을 것 같아요!'라고 비올라 3풀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여기서 끝나나 싶었는데, '윌리엄 텔'의 그 금관을 괴롭히는 행진곡을 또 연주했다. 정말 신나서 박자에 따라 박수라도 크게 치고 싶었다.



버스에서
이날의 말러가 다른 연주와 뭐가 달랐고 어떤 부분이 어느 지휘자와 다른 해석이었는지 궁금하시다면, '객석'이나 기타 공연 리뷰를 참조하시라. 나는 그런 것을 일일히 기억해 어려운 말을 써가면서 설명할 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다. 어려운 말은 내가 쓰다가 헷갈려버린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것은 공연 전체를 보고 그 공연에 대해 생기는 이미지를 묘사하고, 기억나는 몇몇 부분을 언급하는 것 뿐이다.

나에 뇌리에 강하게 박혀버린 몇몇 이미지(그중 가장 강력했던 것은 종악장의 호른 기립이 아니라 3악장의 베이스 솔로였다)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두시간 후면 대전에 도착할테고, 학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여운을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간 반드시 이탈리아에서, 라 스칼라 극장에 가서 오페라를 보리라. 왠만하면 베르디의 것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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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eirion at 2008/10/07 16:07  Reply|Edit|Delete
이거 9월초쯤에 한 그건가?
어쨌든 부럽다. 나도..
Commented by daybreaker at 2008/10/07 19:33  Reply|Edit|Delete
사실 제가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공연은 어떤 느낌일지 또 궁금하네요. 감상기 잘 봤습니다. ^^;
Commented by 좋은자료 at 2008/10/31 02:52  Reply|Edit|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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