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APO 2008
이 공연 소식을 접하고, 꽤 오래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삼중협주곡!
가장 재미없는 협주곡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이 곡을 꼽을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좋아하는 곡을 꼽으라면? 잠시 고민하겠지만(그놈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때문에), 나는 아마 삼중협주곡을 꼽지 않을까 싶다. 들어본 협주곡이 사실 그리 많지도 않지만.
가장 베토벤다우면서도 차분하게 이어지는 악상들, 그리고 처음부터 우르르 꽝꽝하며 이렇게 멋있는 곡이다! 라고 외치기보단, 조용히 시작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피아니스트 정명훈을 볼 수 있다는 기대도 컸다. 옛날에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쿨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을 한 그가 아니던가. 삼중협주곡의 피아노 파트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처럼 웅대하고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지 않지만, 그래도 연주하며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멋있을거라는 기대할 했다.
지안 왕도 마찬가지. 자주 듣는 첼리스트는 아니지만, 몇몇 실내악 음반에서 보여준 그의 면모는 이 날의 공연을 기대하게 했다. 삼중협주곡에서 첼로가 보여줘야 할 그런 면은 어떨지 궁금했다. 이 곡에서 첼로파트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많이 높다고 한다. 곡의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주된 악기도 바로 첼로이다.
다이신 카지모토...는 솔직히 처음 들어본 연주자. 죄송합니다 =_ㅠ 그러나 삼중협주곡에서 설마 레벨이 맞지 않는 연주자들을 캐스팅했으랴.
이 곡을 실연으로 보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레벨이 비슷한 세 연주자들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대표적인 예로 카라얀-오이스트라흐-로스트로포비치-리히테르의 연주가 있다. 이 얼마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라인업이냐..-_- 아르헤리치와 카푸숑 형제의 연주도 그렇다. (이 연주는 유투브에서 영상으로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높은 명성을 가진 솔리스트들은 많지만, 이들을 모으기는 그리 쉬울 것 같진 않다.
하여튼, 세 명의 솔리스트가 만들어내는 그 긴장감을 상상하며 서울로 향했다. 공연 한 시간 전에 도착한지라 여유롭게 악기와 가방을 보관소에 맡겼다. (예원 학생들 사이로 바이올린 케이스를 메고 지나가는 건 좀 쪽팔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방학이라고 거의 매주 예당을 들락거리는 후배를 만나 대한음악사를 잠시 둘러보았다. 그리고 찾아오지 않을 리 없는 지름신 덕분에 라벨 바이올린 소나타의 악보를 구입했다. 예정에 없었는데...꽥 -_-
자리는 매우 좋았다. 1층 중간 오른쪽, 좋은 자리에서 보는 예술의 전당은 참으로 웅장하고...멋있었다. 합창석에 꽉 찬 관객들마저.
튜닝을 마치고, 드디어 솔리스트들이 입장했다. 처음 보는 정명훈! (왠지 자꾸 존칭을 붙여야 할 것 같다) 명성만 들어오던 나로써는 두근두근거렸다.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피아노로 시작하는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시작되고, 나는 서울 예당에 음향에 살짝 놀랐다. 작은 소리지만 모든 악기의 소리가 섬세하게 잡히고 있었다. APO의 톤도 나무랄 데 없었고,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발전부에서 다시 제시된 음형을 어떻게 해석해서...라고 어떻게 말하면 멋있게 보이는지도 모르고, 한번 듣고 바로 그런 해석을 알아챌 내공도 아니고, 무엇보다 음악을 그렇게 들을 생각도 없다. 그래서 그냥 마음 편하게 들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끝나고 처음으로 나온 첼로의 소리가 공연장 전체를 휘감았던 것, 그리고 너무나도 귀공자같고 정갈했던 바이올린의 톤. 거장적인 테크닉과 거친 톤을 들려주었던 지안 왕과는 달리 카지모토는 한발 뒤로 물러서 연주하는 것 같은, 나서지 않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오히려 나는 그게 더 좋았다. 정명훈의 연주는 피아노 파트가 튀는 부분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오케스트라와 두 솔로 악기를 잘 이어주었던 것 같다. 특히 세 악기만 나오는 피아노 트리오와 같은 부분의 앙상블은 최고였다.
베이스 수석도 최고였다. 베이스를 배우는 동생한테 '삼중협주곡에는 베이스 솔로가 즐비' 하다는 말을 들은지라 베이스쪽으로 시선이 많이 갔는데, tutti로 연주하는 줄 알았는데 혼자 연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풍성한 톤이란! 정말 사인이라도 받고싶었다. 특이하게도 첼로가 두 풀트만 연주를 하는 등의 상황이 있었는데, R.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그것과 흡사했다. 악보에 어떻게 명시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연주는 정말 좋은 밸런스를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같아선 기립박수를 치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 일어나는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고는 조용히 앉아았었다. 웃으며 대화하는 솔리스트들의 사이가 좋아보여 왠지 나도 웃었다.
이날의 메인 프로그램-사실 삼중협주곡을 더 기대한 나는 교향곡이 후식이었지만-은 말러 5번은 이 날로 벌써 세 번째 실연을 보는 것이다. 대전시향+키슬러, 몬테카를로필+인발, 그리고 APO+정명훈. 대전시향의 실연은 가장 중요한 3악장에서 졸아버려서 뭐라 말을 못하겠지만 인상적인 연주였고, 인발의 연주는 배배꼬아진 말러를 아주 과장하고 허황하게 표현한 것이 참 잘 어울렸었다. 과연 담백한 베토벤처럼 말러도 그럴까?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과 단 한 음만 빼고 리듬과 형태 모두 흡사한 '장송 행진곡'의 서주. 지휘자는 지휘봉을 흔들지 않았고, 트럼펫 혼자만이 시작했다. 정명훈의 지휘봉과 함께 터져나오는 오케스트라! 나는 이 부분에서 정말 APO의 힘과 예당의 음향에 깜짝 놀랐다. 오케스트라가 그정도의 볼륨을 낼 수 있다는 데 놀랐고, 그정도의 음량을 소화할 수 있는 예당에 또 한번 놀랐다. 베토벤에서는 볼 수 없는 복잡하고도 어려운 테크닉들이 무리없이 소화되었고, 앙상블도 참 좋았다. 중간에 모든 악기가 조용해지고 팀파니만이 서주의 주제를 아주 작게 연주하는 부분이 있는데, 공연장 안에 팀파니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게 왜 인상적이냐 할 지 모르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1악장 끝머리에 활 등으로 연주하는 현악기와, 주제를 연주하는 관악기만이 남았을때 이건 진짜 말러다 싶었다.
2악장도 좋았다. 연주는 좋았는데 조금 평이하지 않았나 싶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이 평이함이 3악장에서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연주는 흠잡을 데 없었고 호른 솔로의 연주도 최상이었다. 다만 수십개의 음표가 복잡하게 대위하는 그 부분이 너무나 기계적으로 맞물렸던 탓인지, 아니면 집중력이 조금 떨어졌던 탓인지(나도 그렇고, 오케스트라도 그렇고) 하나의 음악으로 들리는 면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수석들의 피치카토 사중주 후부터는 좋아지긴 했지만.
집중력이 조금 떨어진 게 휴대전화탓으로 돌려도 될 것 같다. 2악장 중간이었던가, 하필이면 피아노 부분에서 휴대전화가 울렸고, 비올라 수석이 째려보는 걸 나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3악장이 끝나고, '그' 아다지에토를 연주하려는데, 벨소리가 울렸다는 것이다. 더 문제는, 지휘자가 다시 집중을 한 후 지휘봉을 들려는 순간 다시 한번 띵동-. 예당 안 모든 사람들의 맥이 탁 풀렸고, 심지어 지휘자가 뒤를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나도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정말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때문인지-아다지에토는 음악보다는 그저 '연주'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웠고, 좋았지만 뭔가 하프와 스트링만의 연주가 뿜어내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이건 다 핸드폰 때문이다-_-)
하지만 5악장의 피날레는 내가 보았던 실연과 녹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무엇이었다. 중반부터 마치 끝날락 말락 하는 그 선율이 정말 오케스트라 전체에서 넘실넘실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피날레에서, 교향곡은 참으로 말러답게 끝이 났다.
피날레만 크고 웅장하게 잘하면 관객이 좋아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1악장부터 내내 유지되던 긴장감이(그 벨소리만 빼고) 드디어 깔끔하게 끝을 맺었기에, 나는 주저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많은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았다.
셀 수도 없는 많은 커튼콜을 받고 난 후, 정명훈은 악장의 팔을 끌어잡고 퇴장했다. 넓고 시원했던 예당 앞마당에서 나는 후배와 아무말도 하지않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 채로.
지휘자의 해석이 내 마음에 안찬건지, 연습을 많이 못한 것인지, 아니면 벨소리 때문인지. 나는 그냥 벨소리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그 전까지는 정말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정명훈이었으니까.
랑랑과의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거인'은 어떨지 기대된다.

그리고 이건 자랑. 후훗
(사실 호른 솔로 사인도 받았다. 5악장 처음.....빼고는 굉장히 좋았기때문에!
베이스 수석 아저씨는 왠지 접근하기 힘든 포스때문에...못받았다)
Commented by ShaOMeI at 2008/08/26 20:31 Reply|Edit|Delete
